Movies/Review

<영화 리뷰> 성냥공장 소녀 (1990)

표본실 2024. 1. 1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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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성냥 공장 소녀>를 봤다. 같은 감독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를 보고 재미가 있어서 다른 영화를 고르다가 보게 된 것인데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볼 가치가 있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86년, 88년, 90년에 찍은 <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를 흔히들 프롤레타리아 3부작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요즈음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상들처럼 공장에서 물건, 그중에서도 성냥이 생산되는 기계들의 모습을 나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성냥을 생산하는 여러가지 기계들의 나열 마지막에는 주인공 이리스(아이리스)가 제품을 확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아무런 대사 없이도 이리스의 삶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리스의 삶은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대체 가능한, 무력한 존재로 묘사된다. 당연히 의도한 바이겠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1990년대 버전을 보는 듯 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대사가 적은 것으로 유명한데, "성냥공장 소녀"에서는 이 특징이 극대화된다. 주인공은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이는 영화의 미니멀리즘을 보여주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과 다른 인물들은 정말 와 이렇게까지 말을 안해도 되나 싶을 때에서야 겨우 말을 뱉는다. 
 
"성냥공장 소녀"는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웃음이 없는, 차갑고 잔인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주인공의 삶은 비극적이며, 영화는 그녀의 고통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에서 이리스는 애정이 없는 가족과 살며, 연애에도 성공적이지 못하며, 어쩌다 만난 남자는 그녀를 임신시켰음에도 책임지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그러면서 긴 호흡의 장면들로 이리스의 감정들을 보여준다. 슬픈 대사나 통곡 없이도, 영화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리스의 슬픔에 깊게 동화된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데, 무표정으로 그 충격적인 결말을 만들어내는 이리스를 보면서, 이리스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계속해서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영화 안에서 천안문 사태가 뉴스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가 실패했듯, 이리스의 저항도 실패하고 만다.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모습을 안팍으로 보여주는 것 역시 이 영화의 함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카우리스마키가 과거 인터뷰에서 자신의 걸작으로 인정한 유일한 작품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고 한다. 카우리스마키는 일부러 '멍청한 영화'들을 만들었다고 자주 언급하는데, 이는 실제 삶의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반영한다. 완전한 동화는 아니지만, <사랑을 낙엽을 타고>가 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성냥공장 소녀"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삶의 가혹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기쁘고 즐거운 영화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를 날카롭고 차갑게 꼬집는 이런 영화의 가치도 분명 있다. 
 
 
 
 
관람일 : 2024.01.13. (왓챠)
 
개인적 평점 : 4.0 (4.1) / 5.0
 
 
 
관련 영화 리뷰 : <사랑은 낙엽을 타고>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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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화 자료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정성일 평론가 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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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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