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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 24.01.24. 클럽 제로 정성일 평론가 라이브러리톡 후기

표본실 2024. 1. 2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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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4일에 있었던 정성일 평론가의 클럽 제로 라이브러리톡(GV)를 보고 왔다. 영화에 대해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좋은 해설이었다. 영화에 대한 리뷰는 이미 남겼고, GV에 대한 내용을 내 언어로 정돈을 해보려고 한다.

예시카 하우스너에 대한 소개
- 오스트리아 빈 출신 감독이고, 아버지가 현대미술에서 유명한 루돌프 하우스너
- 여동생 세나 하우스너 역시 디자이너로 유명한 아티스트

영화는 매우 냉소적인 영화
- 그런데 영화를 생각하려고 할 때, 어디로부터 들어가야 할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기 어렵다.
- 작품에서는 영어를 쓰고 있고(사실상 무국적), 시대를 알 수 없으며, 공간적 배경 역시 알 수 없다.
- 노백 선생님의 옷 역시 배경을 알려주지 않음.
- 지리적, 문화적 맵핑을 할 수 없는, ‘맥락의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된다.
- 이 영화는 미니멀 적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노백 선생님과, 자신들의 부모와 나누는 대화가 영화의 전부이고 영화에 이면이나 비밀이 없다.
- 이 와중에 사운드는 우리를 홀리게 하는데, 메트로놈을 연상케 하는 사운드는 영화 전체를 일정한 템포, 정확한 박자에 가둬둔다. 이렇게 보면 사운드 스케이프 영화라고까지 볼 수도 있다.
- 이 영화는 아방가르드 영화는 아니다.
- 우화 영화로 봐야 한다. 그리고 우화 영화로 보게 되었을 때, ‘무엇에 관한 우화냐’라고 질문을 이어야 함.
- 21세기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거대 담론들이 많이 나왔다.

영화의 시작
- 학생들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강의를 듣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 개인적인 신체적 이유를 들기도 하지만,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 같은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 ‘그레타 툰베리’가 떠오르는 장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환경운동을 하면서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레타 툰베리처럼, 아이들 역시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 예를 들어, 환경운동과 공해를 주장하는 엘사가 마지막에 가출하면서 남긴 토사물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
- 이름이 나오지 않는 학생 두 명은 노백 선생님의 강의에서 중간에 이탈한다.
- 그리고 헬렌을 제외한 나머지 가출한 학생들은 부모들과의 관계에서 무언가가 존재함. -> 밑에서 이어짐

영화의 메시지, 노백 선생님의 주장 / 가르침
- 서사 진행 과정에서는 환경운동 - 비건주의 - 금식의 과정을 따라가지만 식습관 교정은 영화의 소재에 불구하다.
- 노백 선생님은 의식적으로 식사하고, 적게 먹고, 그리고 아예 금식을 함으로써 뭘 얻으려고 목표를 하는가?
- 자유와 행복을 목표로 하는 데, 이것은 미끼이고 최종 목표는 해방이다.
-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권위로부터,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것
- 이러한 헛된 희망을 목표로 삼기 위해서 노백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실천의 ‘의지’를 근거로 든다.
-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실천이라는 의지의 문제로 상황을 바꿔서 인식시킨다.
- 여기서 니체의 개념, 니힐리즘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일단은 멈추겠다.

냉소주의적 이성은 어디로 밀고 들어가는가?
- 노박 선생님은 해방 안에 담겨 있는 ‘공백’을 마주 보는 고통을 감내하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 여기서 공백은 ‘Nothing’이 아니라 ‘Void’이다.
- 클럽 제로는 ‘Void’에 대한 소유를 놓고 벌이는 인정투쟁이다.
- 부모와 학생들의 싸움 역시 이 인정 투쟁이고, 매우 치열하다
- 이 인정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는 것이 영화의 의도
- 그래서 영화는 우스꽝스럽게 시작해서 어수선하고 오싹하게 끝난다.
- 단순히 먹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행위로써 대상 없는 행위를 하자는 것
(대상 없는 행위는 기의 없는 기표로 얘기할 수도 있다.)
- 학생들이 먹지 않는 것도, 먹지 않는다기 보다, ‘무’를 먹는다고 봐야 한다.
- 노박 선생님의 가르침도 ‘먹지 마라’를 먹으라는 것, ‘공백’을 먹어라
-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학생식당에서나 집에서나 그냥 식당에 가지 않고, 식탁 앞에 앉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집안에서의 식사
- 엘사는 식탁에서 공포, 라그나는 식탁에서 불만, 프레드는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무관심, 벤은 식탁에서 의무와 성공을 먹고 있다. 이들은 이것 대신에 차라리 ‘공백’을 먹는 것이 나으므로 노박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함.
- 자신들의 폭력, 불만, 무관심, 의무를 밀어 제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실천만 하면 되고, 그를 위해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노박의 메시지는 이렇게 효과가 있게 된다.
- 5명 중 유일하게 노백을 따라 가출하지 않은 헬렌에 대해서만 식탁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음.
- 아이들은 자신들의 식탁 위에서의 투쟁에서 억압이 있을 때 노백 선생님의 가르침에 떠넘긴다. 자신의 깨달음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것.
- 예시카 하우스너는 이것이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교적 요소
- 이렇게 책임을 떠넘기는 부분은 성경 누가복음에 나온 논리와 유사하다.
- 그리고 노백 선생님은 자신의 가르침 때문에 박해받기도 한다.
- 아이들이 떠나는 시점은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이렇게 영화는 기독교적 담론을 제공한다.
- 하지만 불교적 요소들도 있다.
- 노백 선생님은 연꽃에 기도하고, 참선하고, 노백 선생님의 방은 일본식 불교에서 자주 보이는 양식이다.
- 노백 선생님을 생각하려면 두 종교의 교집합을 생각해야 한다. ‘믿음’
- 예시카 하우스너는 21세기에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야 할 믿음과 싸우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든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양이 목의 방울달기’같은 우화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온다.)
- 과학적 믿음을 버리고, 믿음을 수행하는 것 사이에 들어있는 ‘대의’에 대한 이야기
- 환경 문제,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 가부장제 억압에 대한 저항은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서로 다른 대의인데, 이것을 ‘Self Eating’, ‘너 자신을 먹어라.’로 연결 짓고 있는 것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대조
- 첫 장면은 원형으로 앉아 있는 것을 와이드 렌즈로 휘어있게 보이도록 찍음
-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만찬이 떠오르는 구도이며, 작품 내 보이는 데스테일 양식을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찍어줌

그래서
상투적 해석 - 자신들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부모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최후의 만찬 이후처럼 아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나서 이상적인 사회로 함께 나아가게 되는 것,
반대 관점 -  그렇다면 왜 헬렌만 남았는가? 부모들은 정말 잘못을 깨닫고 새로운 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관계를 맺을 아이가 없어졌는데요? 이 부분에서 예시카 하우스너의 무서운 냉소가 보이는 것. 자식들이 부모에게 여러 나쁜 감정을 전이시키고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식을 상실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냉소적으로 보면 자식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은 자유와 행복을 얻었다. 와이드 렌즈로 찍던 영화가 마지막에 표준 렌즈로 왜곡 없이 데스테일 양식을 지켜 찍었다는 것은 마지막에 사람들의 마음이 드디어 안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헬렌의 대사를 생각해 보면, ‘그러려면 믿음이 있어야죠.’ 헬렌은 유일하게 노백 선생님의 주장을 ‘믿은 척’했기 때문에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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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용과 별개로 인상 깊었던 내용
- 영화를 보면서 바로 비평 언어가 떠오르는 건 직업이 평론가가 아닌 이상 별로다.
- 영화를 보면서 경험하는 게 중요하고, 마지막 장면에 딱 떠오르는 단어를 잡고 그것을 놓치지 말아라.
- 부모에게 가장 끔찍한 자식은 떠나지 않는 자식이다.

여전히 내 취향의 영화가 되기에는 멀었지만, 그래도 꽤나 괜찮은 영화라는 것에는 동의하게 되었다.

클럽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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