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며 변화해왔다. 초기 페미니즘 영화 이론이 여성 이미지와 남성 응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1990년대 이후에는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관점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젠더뿐 아니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장애, 국적 등 다양한 정체성 범주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주목하고, 고정된 정체성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퀴어 이론의 관점이 중요해졌다. 또한 2000년대 이후에는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복잡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 속 여성성과 주체성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교차성 이론과 영화 속 다중적 정체성
교차성의 개념과 중요성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1989년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제안한 개념으로, 다양한 사회적 범주(젠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중첩된 차별과 억압의 양상을 분석하는 이론적 틀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주류 페미니즘은 흑인 여성, 레즈비언, 노동계급 여성 등 다양한 여성들의 경험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영화 이론에서 교차성 관점은 영화 속 재현과 영화 산업 구조, 그리고 관객의 수용 과정에서 복잡하게 작동하는 권력 관계를 다층적으로 분석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단순히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여성이, 어떤 맥락에서,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재현되는가'라는 더 복잡한 질문을 제기한다.
벨 훅스와 흑인 여성의 응시
벨 훅스(bell hooks)의 「흑인 응시(The Oppositional Gaze)」(1992)는 로라 멀비의 남성 응시 이론을 인종적 관점에서 확장한 중요한 텍스트다. 훅스는 흑인 여성들이 백인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영화에 대해 '저항적 응시(oppositional gaze)'를 발전시켜왔다고 주장한다.
"흑인 여성들은 지배 질서가 만든 이미지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능력을 통해 저항의 장소를 창조했다. 백인 최상위 권력 구조 내에서 거부당한 '응시의 권리'를 되찾는 방식으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는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훅스는 특히 백인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이 인종적 차원을 간과했음을 비판한다. 로라 멀비의 이론은 모든 여성이 마치 백인 여성인 것처럼 일반화하며, 흑인 여성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인종화되고 타자화되는지, 그리고 흑인 여성 관객이 이런 재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훅스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영화 속 여성의 객체화를 비판하면서도, 흑인 여성에 대한 식민주의적 응시의 문제는 간과했음을 지적한다. 백인 여성은 남성 응시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유색인종에 대한 식민주의적 응시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 페미니즘과 초국적 영화
글로벌 남반구(Global South)와 디아스포라 출신 여성 감독들의 작품은 서구 중심주의와 식민주의적 시선에 도전하는 중요한 영화적 실천이 되어왔다.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 딥파 메타(Deepa Mehta), 미라 나이르(Mira Nair), 쳉가지 캄윈바(Tsitsi Dangarembga) 같은 감독들은 문화적 특수성과 초국적 연대의 긴장 속에서 복잡한 여성 주체성을 탐구한다.
트린 T. 민하의 실험적 다큐멘터리 『성 이름 여성 베트남 생 마크(Surname Viet Given Name Nam)』(1989)는 베트남 여성들의 경험을 재현하면서도, 재현 자체의 문제성을 성찰적으로 드러낸다. 인터뷰, 연출된 장면, 아카이브 푸티지, 문자 텍스트 등 이질적 요소들의 충돌을 통해 단일하고 투명한 '진실'의 재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엘라 쇼핫(Ella Shohat)은 「포스트-제3세계 영화에서의 페미니즘(Post-Third-Worldist Feminism in Cinema)」에서 '다문화 페미니즘(multicultural feminism)'이라는 접근을 제안한다. 이는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의 여성 경험을 인정하면서도,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식민주의의 구조적 조건을 간과하지 않는 비판적 관점이다.
이런 접근은 문화적 본질주의(모든 문화는 고유하고 불변하다는 관점)와 보편주의적 페미니즘(모든 여성의 경험은 동일하다는 관점) 모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대신,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여성 주체성과, 이를 가로지르는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퀴어 영화 이론과 실천
퀴어 이론의 기본 개념
1990년대 초 등장한 퀴어 이론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 등의 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퀴어 이론은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고정된 정체성 범주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수행되는 유동적인 것으로 본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은 젠더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행위와 의례를 통해 구성된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젠더는 그것이 표현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바로 그 표현들"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은 영화 속 젠더 재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퀴어 이론은 또한 이성애규범성(heteronormativity)—이성애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그 외의 섹슈얼리티를 일탈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영화 속에서 이성애규범성이 어떻게 자연화되고, 또 때로는 교란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퀴어 영화 이론의 중요한 과제다.
뉴 퀴어 시네마
B. 루비 리치(B. Ruby Rich)는 1992년 「뉴 퀴어 시네마(New Queer Cinema)」라는 글을 통해 1990년대 초 등장한 새로운 퀴어 영화 물결을 명명하고 분석했다. 에이즈 위기, 퀴어 행동주의의 부상, 포스트모던 이론의 영향 속에서 등장한 이 흐름은 단순히 퀴어 캐릭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적 형식과 내러티브 구조 자체를 퀴어링(queering)하는 실험적 영화들을 포함한다.
토드 헤인즈(Todd Haynes)의 『포이즌(Poison)』(1991), 톰 칼린(Tom Kalin)의 『스웬크(Swoon)』(1992), 그레그 아라키(Gregg Araki)의 『리빙 엔드(The Living End)』(1992) 등은 선형적 내러티브의 거부, 장르 혼합, 캠프 미학의 활용, 역사적 재구성 등을 통해 규범적 영화 형식과 성 정치학에 도전했다.
리치는 이런 영화들이 "동성애자의 정체성 정치학을 넘어, 상이한 인종, 계급, 성별, 섹슈얼리티, 미학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분노와 급진적 상상력을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뉴 퀴어 시네마는 단순히 '긍정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대신, 정체성과 욕망의 복잡성, 모순, 유동성을 탐구했다.
트랜스 시네마와 트랜스 이론
최근에는 트랜스젠더 경험과 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과 이론적 논의가 증가하고 있다.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 샌디 스톤(Sandy Stone), 잭 할버스탐(Jack Halberstam) 같은 학자들은 트랜스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포착하는 이론적 틀을 발전시켜왔다.
트랜스 영화 비평은 단순히 트랜스 캐릭터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매체가 어떻게 젠더의 유동성과 구성된 성격을 드러내거나 은폐하는지 분석한다. 특히 트랜스 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환(transition)' 장면의 재현 방식, 트랜스 신체의 시각화, 시점과 응시의 구조 등이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된다.
세바스찬 레리오(Sebastián Lelio)의 『환상적인 여자(A Fantastic Woman)』(2017),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2017), 시알 M. 황(Si'an M. Hwang)의 『아가씨(The Handmaiden)』(2016) 같은 최근 영화들은 복잡한 젠더와 섹슈얼리티 표현을 통해 기존의 이분법적 틀을 교란한다.
포스트페미니즘과 현대 영화
포스트페미니즘의 개념과 맥락
'포스트페미니즘'은 1990년대 이후 미디어 문화에서 관찰되는 복잡한 담론적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페미니즘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페미니즘을 '이미 성취된 것' 혹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드는 역설적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앤젤라 맥로비(Angela McRobbie)는 포스트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을 고려하고 수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버리고 거부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여성의 선택, 역량강화(empowerment), 개인적 자유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은 종종 구조적 불평등과 사회적 변화의 필요성을 개인적 해결책으로 환원한다.
로잘린드 질(Rosalind Gill)은 포스트페미니즘 미디어 문화의 특징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여성성은 신체적 속성으로 정의됨, 자기감시와 자기규율의 증가, 메이크오버 패러다임(자기 변형을 통한 정체성 구성), 자연스러움의 신화(외모 관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함), 개인적 선택과 역량강화의 강조 등.
포스트페미니즘 영화와 텔레비전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작품들은 포스트페미니즘 미디어 문화의 대표적 사례로 분석된다. 이런 텍스트들은 여성의 성적 자율성, 소비 능력, 직업적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로맨스와 외모에 대한 전통적 강조를 유지하는 모순적 특성을 보인다.
다이앤 네그라(Diane Negra)와 이본 타스커(Yvonne Tasker)는 『가십걸』,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같은 "포스트페미니즘 청춘물(postfeminist teen)과같이 영화를 분석하며, 이런 텍스트들이 어떻게 젊은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소비자 역량을 강조하면서도, 결국은 전통적 젠더 역할로의 회귀를 자연화하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한나나 함라위(Hannah Hamad)는 『주노』,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같은 영화에서 나타나는 '포스트페미니즘 가족 로맨스'를 분석한다. 이런 영화들은 비전통적 가족 형태와 여성의 자율성을 표면적으로는 긍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모성(motherhood)을 여성 정체성의 핵심으로 재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백래쉬와 포스트페미니즘 역설
수전 팔루디(Susan Faludi)의 『백래쉬(Backlash)』(1991)는 1980년대 미디어가 어떻게 페미니즘의 성과에 대한 반동적 반응을 조장했는지 분석한다. 이런 백래쉬는 직접적인 반페미니즘 수사보다는, 종종 '포스트' 담론의 형태로 나타난다—페미니즘은 '이미 성공했으므로'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의 주장이다.
최근 "#MeToo" 운동 이후 영화 산업에서도 젠더 불평등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백래쉬 현상이 관찰된다. 여성 감독의 기회 확대, 스크린 다양성 증가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한편, 이를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으로 비판하는 반동적 담론도 강화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캡틴 마블』, 『원더우먼』 같은 여성 중심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복잡한 문화적 위치를 점한다. 이들은 여성 영웅의 가시성을 높이는 진전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개인적 임파워먼트와 선택의 신자유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구조적 젠더 불평등의 문제를 탈정치화할 위험도 있다.
현대 페미니스트 영화 실천
여성 감독의 부상과 도전
최근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셀린 시아마(Céline Sciamma), 아바 듀버네이(Ava DuVernay), 클로이 자오(Chloé Zhao),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등 다양한 스타일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성 감독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와 글로벌 영화 산업의 구조적 성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USC 애넨버그 포용성 이니셔티브(Annenberg Inclusion Initiative)의 연구에 따르면,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의 여성 감독 비율은 여전히 10% 미만이며, 주요 영화제 수상작에서도 여성 감독의 비중은 낮다.
이런 맥락에서 '50/50by2020'과 같은 캠페인이 영화 산업 내 젠더 평등을 위한 구체적 목표와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타임즈업(Time's Up)과 같은 운동은 영화 산업 내 성희롱과 폭력에 대항하며, 더 포용적이고 안전한 작업 환경을 위한 변화를 촉구한다.
페미니스트 영화 미학의 확장
현대 페미니스트 영화는 단순히 '여성 캐릭터의 재현'이라는 차원을 넘어, 영화적 형식과 미학 자체의 페미니스트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2019)은 '여성적 응시(female gaze)'의 대표적 사례로 논의된다. 이 영화는 여성 화가와 그녀의 모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전통적인 '남성 응시'와 다른 방식의 보기와 보여짐의 관계를 탐구한다. 욕망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 그리고 권력이 아닌 상호성에 기반한 응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린 램지(Lynne Ramsay)나 클레어 드니(Claire Denis) 같은 감독들은 감각적, 촉각적 영화 미학을 통해 전통적인 시각 중심적 영화 문법을 확장한다. 이들의 작품은 신체, 물질성, 정서적 경험에 대한 풍부한 탐구를 통해 페미니스트 영화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스트 영화 실천
디지털 기술과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은 기존 영화 산업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대안적 제작, 유통, 관람 방식을 가능하게 한다. 유튜브, 비메오 같은 플랫폼은 새로운 페미니스트 영화 목소리의 등장을 촉진한다.
아이샤 타일러 디거스(Issa Rae)는 웹시리즈 「뻘쭘한 흑인 소녀의 일기(The Misadventures of Awkward Black Girl)」로 시작해 HBO 시리즈 「인시큐어(Insecure)」의 성공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다. 이런 흐름은 전통적인 영화 산업의 게이트키핑을 우회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페미니스트 영화 페스티벌, 학교, 워크숍 등 대안적 영화 교육과 상영 공간도 확대되고 있다. 이는 기존 영화 교육과 관람 문화의 남성 중심성을 비판하고, 더 다양하고 포용적인 영화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실천이다.
결론: 복잡성과 다양성을 향해
현대 페미니즘 영화 이론과 실천은 단일한 관점이나 접근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실천이 교차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역동적 장이다. 교차성 이론, 퀴어 이론,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등의 영향으로, 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분석이 발전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성' 범주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인종화된 여성, 퀴어 여성, 장애를 가진 여성, 글로벌 남반구의 여성 등 다양한 위치에서의 경험과 관점을 포괄하는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 동시에 이런 차이 속에서도 연대와 공통의 정치적 비전을 모색하는 것이 계속되는 과제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과 실천은 단순히 학문적 분석이나 미학적 실험이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의 일부다. 영화가 어떻게 젠더화된 권력 관계를 재생산하거나 도전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적 재현과 관객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영화를 넘어 사회 전반의 변화를 위한 중요한 기여다.
'Movies > Stud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의 기본 24. 포스트식민주의 영화 이론: 지배·저항·타자화 서사 분석과 서구 중심주의 비판 (1) | 2025.05.06 |
---|---|
영화의 기본 23. 퀴어 영화 이론: 정체성과 욕망의 시각화를 통한 헤테로노머티브 서사의 해체 (6) | 2025.05.06 |
영화의 기본 21. 페미니즘 영화 이론과 남성 응시: 영화 속 젠더 정치학 (0) | 2025.05.06 |
영화의 기본 20. 관객과 수용 이론: 스펙터이터십과 시청각 경험의 심리학 (0) | 2025.05.05 |
영화의 기본 19. 라캉과 영화: 응시 이론과 주체 형성의 불안정성 (0) | 2025.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