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영화가 탄생한 순간부터 제기된 이 근본적 질문은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앙드레 바쟁이 『영화란 무엇인가?(What is Cinema?)』에서 던진 이 질문은,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영화란 무엇이었는가?(What was Cinema?)"로 변형되고 있다. 초기 영화의 혼돈스럽고 실험적인 시기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가 거기에 있다.
어트랙션의 시네마: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가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놀라운 구경거리에 매료되었다. 초기 영화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야기' 중심의 영화와는 전혀 달랐다.
기술적 경이로움
<열차의 도착>(1895)을 보고 관객들이 공포에 질려 극장에서 도망쳤다는 일화는 과장되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주는 충격을 잘 보여준다. 단순히 열차가 역에 들어오는 50초짜리 영상이 당시 관객들에게는 마법과도 같았다.
톰 거닝의 '어트랙션의 시네마'
영화학자 톰 거닝은 1906년 이전의 영화를 '어트랙션의 시네마(Cinema of Attractions)'라고 명명했다. 이 시기 영화의 특징은:
- 전시적 성격: 이야기보다는 볼거리 자체가 중요
- 직접적 관객 소통: 등장인물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에게 손짓
- 단편적 구조: 연속성 없는 개별 장면들의 나열
- 다양한 상영 맥락: 보드빌 극장, 카니발, 박람회 등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은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특수효과와 환상적 이미지가 논리적 서사보다 중요했다. 달의 눈에 로켓이 박히는 유명한 장면은 시각적 충격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초기 영화의 매체 특수성 탐구
영화가 기존 예술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초기 영화 제작자들과 이론가들은 이 질문에 답하려 했다.
움직임의 재현
영화의 가장 명백한 특징은 움직임을 기록하고 재현한다는 것이다. 에티엔-쥘 마레이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연속 사진 실험은 영화의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머이브리지의 <질주하는 말>(1878)은 말의 네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음을 증명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기계의 눈이 포착한 것이다.
시간의 조작
영화는 시간을 압축하고 확장할 수 있다. 초기 영화들은 이런 가능성을 실험했다:
- 역재생: 무너진 벽이 다시 세워지는 마법
- 가속과 감속: 꽃이 피는 과정을 몇 초로 압축
- 정지와 대체: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변신
멜리에스는 이런 트릭을 활용해 무대 마술로는 불가능한 환상을 창조했다. <고무 머리>(1901)에서 그의 머리가 풍선처럼 커지는 장면은 영화만이 가능한 마법이었다.
초기 아방가르드: 순수 영화를 향한 실험
1920년대, 유럽의 예술가들은 영화를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상업 영화의 관습을 거부하고 영화 매체의 본질을 실험했다.
절대 영화 (Absolute Film)
독일의 실험 영화 운동은 영화를 회화나 음악처럼 순수한 형식으로 만들려 했다.
발터 루트만 <작품 I-IV> (1921-1925)
- 추상적 형태와 리듬만으로 구성
- 서사나 재현을 완전히 배제
- 시각적 음악을 추구
한스 리히터 <리듬 21> (1921)
- 기하학적 형태의 운동
- 음악적 구조를 시각화
- 영화를 "시간 속의 회화"로 정의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
프랑스 영화인들은 영화를 '움직이는 회화'로 보았다.
제르멘 뒬락 <조개껍질과 성직자> (1928)
- 꿈과 무의식의 시각화
- 상징적 이미지의 연쇄
- 내면 심리의 표현
장 엡스탱의 '포토제니' 이론
- 영화만이 포착할 수 있는 특별한 순간
- 클로즈업과 슬로우모션의 미학
- 일상적 대상의 시적 변형
다다와 초현실주의 영화
다다이스트들은 영화를 기존 예술과 논리를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르네 클레르 <막간> (1924)
- 비논리적 이미지의 연속
- 관습적 인과관계 파괴
- 놀이와 우연성 강조
루이스 부뉴엘 & 살바도르 달리 <안달루시아의 개> (1929)
- 꿈의 논리를 따르는 편집
- 충격적 이미지 (눈을 자르는 장면)
- 무의식과 욕망의 표현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영화인들은 영화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도구로 보았다.
지가 베르토프 <카메라를 든 사나이> (1929)
- 영화 제작 과정의 자기반영성
- 도시 생활의 리듬 포착
- "영화-눈" 이론 실천
매체 특수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
초기 영화 이론가들은 영화만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하려 했다.
리치오토 카누도의 '제7예술'
이탈리아 시인 카누도는 1911년 영화를 '제7예술'로 선언했다. 그는 영화가:
- 공간 예술(건축, 조각, 회화)과 시간 예술(음악, 무용, 시)을 종합
- 리듬과 조형성을 동시에 구현
- 새로운 종합 예술의 탄생
벨라 발라즈의 '가시적 인간'
헝가리 이론가 발라즈는 영화가 새로운 시각 문화를 창조한다고 보았다:
- 클로즈업을 통한 미시적 세계의 발견
- 얼굴 표정의 보편적 언어
- 침묵의 웅변성
장 엡스탱의 '영화적 지성'
엡스탱은 영화가 인간 지각을 확장한다고 주장했다:
- 시간의 가변성 (느림과 빠름)
- 공간의 유동성 (원경과 근경)
- 새로운 인식론적 도구
어트랙션에서 내러티브로의 전환
1906년경부터 영화는 점차 이야기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 전환의 이유는:
경제적 요인
- 상영 시간 연장으로 입장료 인상
- 반복 관람 유도
- 중산층 관객 유치
기술적 발전
- 필름 길이 증가
- 편집 기술 발달
- 스튜디오 시스템 구축
문화적 정당성
- 연극, 문학과의 연계
- 예술적 지위 획득
- 검열 회피
그러나 어트랙션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액션 영화의 스펙터클, 뮤지컬의 쇼 넘버, SF 영화의 특수효과는 모두 어트랙션의 현대적 변형이다.
아방가르드의 유산
초기 아방가르드의 실험 정신은 영화사 전체에 걸쳐 계승되었다.
전후 실험 영화
스탠 브래키지, 마야 데렌, 케네스 앵거 등 미국 실험영화 작가들은 초기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브래키지의 <개의 별자리>(1961)는 죽은 개를 해부하는 과정을 통해 지각의 한계를 탐구했다.
구조영화
1960년대 구조영화 운동은 영화 매체 자체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마이클 스노우의 <파장>(1967)은 45분간의 줌인으로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디지털 시대의 실험
현대 비디오 아트와 뉴미디어 아트는 초기 아방가르드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빌 비올라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은 시간의 조작과 지각의 확장이라는 주제를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다.
영화의 정체성 위기와 확장
디지털 혁명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한다.
매체의 경계 해체
- 필름에서 디지털로
- 극장에서 스트리밍으로
- 수동적 관람에서 인터랙티브 경험으로
새로운 어트랙션
- VR/AR 영화
- 인터랙티브 내러티브
- AI 생성 영상
포스트-시네마 담론
레프 마노비치, 프란체스코 카세티 등의 이론가들은 '포스트-시네마' 시대를 논한다. 영화는 더 이상 고정된 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문화적 실천이다.
What is (was) Cinema?: 계속되는 질문
초기 영화와 아방가르드가 던진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 매체 특수성: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기술과 예술: 기술적 가능성이 미학적 형식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 지각의 확장: 영화는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 현실과 환영: 영화적 재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탐구를 요구한다. 초기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영화는 고정된 형식이 아니라 계속 진화하는 매체다.
어트랙션의 귀환
흥미롭게도, 디지털 시대에 어트랙션의 시네마가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 유튜브와 틱톡: 짧은 클립 중심의 소비
- GIF와 밈: 순간적 스펙터클의 무한 반복
- VR 체험: 서사보다 감각적 몰입 강조
톰 거닝이 지적했듯이, 어트랙션의 충동은 영화의 본질적 요소다. 초기 영화가 던진 "이것을 보라!"는 외침은 형태를 바꾸며 계속되고 있다.
영화의 역사는 끊임없는 자기 정의의 과정이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마다 달라졌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영화를 살아있게 만든다. 초기 영화와 아방가르드의 급진적 실험들은 우리에게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완성된 형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성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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